공유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결국 티스토리에 올리고야 마는, 오로지 로타를 위한, 로타에 의한 길고도 긴 주저리.
글을 시작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지독한 오스틴 버틀러 팬이라서 인터뷰를 통해 그가 영화 내에서 보여줄 캐릭터 해석을 영화 관람 전에 다 섭렵하고 갔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오스틴의 캐해 나레이션이 귀 옆에서 들리듯이 ‘아 이 장면은 오스틴이 말했던 xx한 부분!’ 혹은 ‘이 장면은 설마 오스틴이 말했던 yy하는 부분!’ 따위의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덕분에 백그라운드 서사 풍부하게 잘 봤다. 듄 2차관람까지 마쳤으니 로타에 대해 생각해 본 바를 조금 정리해보려 함. 아래의 글은 순전히 개인적인 해석과 감상의 글임을 유념해 주십시오. 반박시 당신 말이 전부 맞습니다.
1. 로타 전반적인 감상
오스틴이 말한 그대로다. 신체적으로 강하고 주목받길 좋아하며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그의 말투와 행위, 눈짓 하나하나가 섹시하며(!!) 전투시의 행동은 짐승의 것과 닮아있다. 동시에 외로우면서 취약한 면모가 종종 드러난다. 마지막 지점은 영화 내에 대놓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부 장면에서 오스틴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며, 그의 인터뷰 내용을 마음 한 켠에 담아두고 그 표정을 본다면 로타가 아주 안쓰러워서 내 머리카락이 죄다 빠질 것 같은 감상에 빠질 수 있다.
듄의 세계관(미술, 종교, 정치 등)이 현실 세계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하코넨 가문은 특히나 일상에서 보기 불가능할 정도로 과한 특성의 집합체이다보니, 이것이 맞물려 오스틴의 연기에 극한의 자유를 주지 않았나 싶다. 반나체로 서서 등근육 섬유 하나하나를 깨우듯 꿈틀대며 낮게 한숨을 뱉고, 본인 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길게 혀를 뽑아 턱근육을 움찔대며 칼끝의 날카로움을 가늠해보고, 까맣게 칠해 보이지도 않는 이를 드러내가며 섬뜩하게 웃는다. 심지어 아레나씬에선 흥분에 겨워 광견병 걸린 짐승마냥 침도 가감없이 흘리는데, 그 침으로 치아에 발린 검은칠이 씻겨나가기까지 한다. 오스틴이 살면서 이런 현실과 동떨어진 강력한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특히나 올드 할리우드 감성과 맞닿아있어 코믹스나 판타지 기반의 작품을 할 생각이 거의 없어보이는 본체의 성격까지 고려한다면, 로타는 오스틴에게 아마 연기 인생에 다시는 없을 역할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대머리에 잔혹하고 동시에 섹시해야만 하는 역할을 연기하게 됐는데, 완전히 판을 깔아준 거 아닌가. 이 말도 안되는 특성을 오스틴이 맛깔나고 재미지게 요리해왔다. 그가 연기한 모든 장면에서 그의 고민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본체 성격과 생각 궁예는 최대한 자제하려고 하나,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오스틴은 로타 연기하면서 무진장 즐거웠을 것이다.
2. 뱀, 표범, 그리고 상어
오스틴이 내한 당시 진행했던 씨네21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동물적 특성은 뱀, 표범, 그리고 상어에서 따온 것이라 했다. 이 인터뷰는 내가 영화를 시사회로 본 다음날에 공개되었는데, 해당 부분을 읽자마자 오스틴은 본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모습을 정확히 스크린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배우라고 감탄했다.
그가 설명한 동물적 특성은 아레나씬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된다. 아레나를 시작하기 전 대기실에서 허물을 벗은 듯 반나신으로 몸을 단장하는 모습부터, 끝이 좁은 혓바닥을 길게 내뽑아 움푹 들어가 갈라진 가운데 지점을 날선 칼로 눌러보는 모습까지.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가기 전의 모든 모습이 그가 독을 가득 품은 뱀이라고 소리치고 있다. 심지어, 후술하겠지만, 바론 남작과 유사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잔뜩 거칠어진 발성으로 대사를 낮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 역시도 뱀의 속삭임을 떠올리게 한다. 원작을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으나 원작의 로타가 독을 바른 칼로 무장한 속임수 가득한 인물이라는 걸 생각했을 때, 칼에서 독을 뺀 대신 눈빛에서 행동까지 독기를 풀풀 풍기는 뱀으로 현대의 로타를 표현한 것은 탁월한 결정이라 생각한다. 아, 독잇뱀은 독없뱀에 비해 두려움이 없고 사람을 존나 꼬라본다나 뭐라나, 하는 그런 짤도 생각나더라.
솔직해지자면 표범을 선택한 것은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로타는 아레나에서 (손쉬운) 먹잇감을 사냥하는 포식자의 역할이었으니까 표범이든 사자든 대형 고양이과 동물을 레퍼런스로 활용하기 딱 알맞았다고 생각했다. 아트레이더스의 전사와 결투를 벌일 때 가만히 동태를 살피다가 한순간에 튀어나가 상대를 몰아붙여 제압하는 모습은 표범이 사냥하는 모습과 상당히 닮아있다.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하자면 상대를 위협할 때 혹은 승리했을 때 포효하는 모습은 사자를 닮았다고 하고 싶다. 조금 뻔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보면 정말 보는 사람의 공포심를 자극한다. 이 남자 정말 입도 크고 소리도 크구나…하는 생각과 더불어서. 역시 오스틴의 영혼의 동물은 사자(엘비스 프로모 인터뷰 참조)
표범과 뱀은 악역을 연기할 때 주로 레퍼런스로 활용되는 동물이므로 짐작에 어려움은 없었던 것이 비해, 상어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제3의 동물'로만 느껴졌다. 분명 뱀과 표범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데, 도통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러다 씨네21 인터뷰를 보고 머릿속에 전구가 켜졌다. 상어구나! 전투 중 포효하며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드는 모습은 상어가 사냥감을 물고 흔들어 숨통을 끊어놓는 모습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다. 어두운 회랑을 거니는 걸음걸이는 빛이 닿지 않는 심해를 미끄러지듯이 헤엄치는 것 같으며, 그때 몇 수 앞을 계산하면서 꿍꿍이를 짐작하기 어렵도록 짓는 표정과 눈빛은 상어의 텅빈 눈을 떠올리게 한다. 행동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서사도 상어와 닮은 점이 있다 생각된다. 상어는 헤엄치기를 멈추면 몸이 가라앉아 죽는다. 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하코넨 가문에서 태어나 남작의 눈에 띄어 평생을 폭력과 전투 속에서 살아온 로타 역시도, 끊임없이 강해져야만 했으며 죽지 않기 위해 결투와 투쟁을 멈출 수 없던 인물 아니었을까. 다만 본인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오타쿠를 미치게 한다.
3. 결투
이룰란이 로타를 미친놈이라고 멸시한 것 치고 로타는 결투에서 상당히 전사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하코넨은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치고 꽤나 의외인 모습. 물론 그동안은 약에 취한 노예들만 쇼의 일환으로 상대해왔으니 실전은 아트레이더스 출신 전사와의 결투가 처음이었겠지만, 마침내 결투다운 결투를 치렀고 거기에서 승리했다는 고양감에 휩싸인 채로도 “잘 싸웠다, 아트레이더스” 라고 말해주며 포옹이자 일격을 가하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깊다. 우리 로타 생각만큼 미친놈은 아니다. 솔직히 로타에 대한 서사적인 부분이 충분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아레나씬은 로타의 전사와 짐승으로서의 면모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좋았던 부분을 나열하자면 초단위로 읊어야 하기 때문에 하지는 않겠지만, 이 먹잇감은 내 것이라 부르짖는 장면과 흥분에 겨워 침을 뚝뚝 흘리며 기괴하게 웃는 장면만큼은 가히 최고라 말하고 넘어가겠다. 아레나 장면만 1만원 주고 볼 수 있다고 하면 매일마다 보러 갈 거다.
4. 남작과의 관계
오스틴이 그동안의 인터뷰에서 풀어준 바와 같이 로타는 남작을 향한 증오와 함께 애정(혹은 내 생각으로는 경외심)을 품고 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개의 장면이 더 효과적이다’하는 드니 감독의 철칙 때문인지 몰라도 그러한 증오와 애정의 원인은 영화에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결과물인 감정 자체는 오스틴의 섬세한 표정연기에서 분명하게 전달된다.
남작을 향한 로타의 증오는 남작의 욕조(?) 장면에서 가감없이 드러난다. 기에디 프라임의 지배자에게, 자신의 백부에게 ‘당신을 욕조에 처박아 죽여버리고 싶다’고 하는 오진 조카 되시겠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턱근육이 인상적. 남작과의 키스 장면과 관련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 그루밍의 의도가 명백한 남작의 키스 후 남작의 목덜미를 붙들고 역으로 입을 맞추는 장면에서도 나는 그의 분노를 엿볼 수 있다고 본다. 남작이 취했던 제스쳐와는 정반대로 힘이 잔뜩 들어가 특유의 턱근육이 잔뜩 불거진 채 거칠게 입술을 덮치는 모양새는 남작을 향한 선전포고처럼 다가왔다. 마치 “지금 당장은 당신의 장기말이 되어주지만 아라키스를 지배한 뒤에 내가 당신을 집어삼킬 것이다” 라고 선포하는 듯한 공격성이 느껴졌다고 해야하나. 때문에 그 장면은 남작과 로타의 파워게임의 일환으로 보였다.
이런 증오만 있었다면 캐릭터가 납작해졌겠지만 로타는 남작에게 다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중간 과정이야 어쨌든 남작은 늘 로타에게 원하는 보상(권력)을 가져다주었고, 로타가 세 수 앞을 내다볼 때 남작은 열 수 앞을 내다볼 수 있었다. 자신을 착취해 온 남작에게 분노를 품지만 동시에 그가 주는 권력의 달콤함,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지략과 속임수에 매료되어 있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 남작을 독기 가득한 눈으로 꼬나볼 때는 언제고 황좌 얘기가 나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눈을 내리깔고 순해진다(내리깔 때 존나 이쁘고 요망하다). 라반을 제압하고 모욕할 땐 남작의 앞에서 그가 보고 들으라는 듯이 라반과 로타, 둘 중 누가 우위인지를 발등에 입맞추도록 만드는 쇼를 통해 확실히 짚고 넘어간다. 동시에 로타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남작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요 앙큼한 놈. 얼굴도 이쁘고 일도 척척 잘해내는 조카가 자기 손으로 해결이 안되는 사이즈의 문제를 마주하면 혼자 쩔쩔매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한테 도움을 청한다니, 남작이 괜히 로타 싸고도는 게 아니다. 뭔소리지. 암튼 로타는 자기 능력치의 한계를 잘 알고 그것을 인정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남작에게 일종의 애정 혹은 경외심을 느낀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무튼 이런 경외 섞인 증오는 황제의 우주선 장면에서 상당히 묘한 로타의 표정으로 집약되어 나타난다. 황제군이 남작의 탈것(?)을 끊어버렸을 때 로타는 다소 놀라긴 하지만 바닥에 엎어져 쩔쩔매는 남작을 보곤 조소한다. 한번도 직접 본 적 없는 남작의 취약한 모습을 보았을 때, 바로 그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저속한 말이지만 속으로 ‘꼬시다’하고 생각하는 게 눈에 선했다. 그러나 흥미롭게 난장판을 지켜보다가 폴이 남작을 죽인 순간, 그의 표정이 기묘해진다. 입꼬리 올려가며 웃던 얼굴에서 점차 웃음이 지워지며 경련하듯 입꼬리 떨린다. 그의 생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만큼은 한눈에 읽어낼 수 있었다. 생각해 본 바로는, 그토록 바라왔던 남작의 죽음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데에 대한 희열, 그의 죽음이 자신의 차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분노와 미련, 자신의 멘토이자 목표였던 자가 사라진 데에 대한 허무함. 이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그런 표정연기가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각본으로만 봤다면 로타의 이런 내면서사를 읽어내기 힘들텐데, 오스틴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개맛도리 내면서사를 말아와서 표현까지 해낸 걸까. 기특해 죽겠다. 마키아밸리적 권력 관계라니 짜증나 왜이리 기특한 거야.
5. 마고와의 관계
트레일러 공개 당시부터 레아와 오스틴의 장면을 기대해왔는데, 아레나 장면부터 침실 장면까지 둘이 붙는 장면은 통으로 기립박수를 치고 싶었다. 얼굴합은 말할 것도 없고 로타가 마고를 향해 품는 욕정과 경계심이 자아내는 모든 분위기가 야릇하다. 오스틴이 어느 인터뷰에서 로타한테 틱이 있을거라 했는데, 마고가 베네 게세리트임을 알아채는 장면에 몇 번 나오는 찡그림이 그것이지 않을까 싶다. 폴이 목소리를 썼을 때에도 놀란 눈치 외에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마고 앞에서는 취약함을 잔뜩 드러내며 불안감에 괴롭다는 듯이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틱 증세까지 보인다는 게 참 흥미롭다. 이건 내 개인적인 해석과 상상이지만, 로타는 어머니의 죽음과 연관된 콤플렉스를 지녔고 그것이 어머니의 특성을 강하게 지닌 여성형 베네 게세리트를 만나면 불안증으로 증폭되는 것 아닐까 싶다. 더 나아가서 어머니의 죽음의 배경에 남작과 베네 게세리트의 권모술수가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해본다. 자신이 죽인 어머니와 닮아있으면서 어머니의 원수의 일원에게 욕정을 느낀다니 이게 뭔 개소린가 싶겠지만,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적 무언가의 웅앵으로 꽤나 분위기 있어지는 설정이라 생각한다. 뭔소리지.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마고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면서 두려움과 경계심을 놓지 않는 로타가 좋다 이 말이다.
이건 별 중요한 얘기 아니긴 한데, 로타와 마고의 침실 장면도 둘 중 그 누구도 벗질 않았으나 분위기가 상당히 야하다… 써놓고 보니 존나 중요하다. 오스틴은 연기력이 상승한 이래로 찍은 주요 필모에서 여성과 붙는 섹슈얼한 장면을 찍을 때 늘 수동적인 제스쳐를 취해왔다(그런 장면 없는 원탐할 텍스는 논외로 한다). 엘비스가 프리실라와 키스하는 장면에서는 엘비스의 볼을 잡으며 적극적으로 키스하는 것은 프리실라 쪽이었고 엘비스는 그 열기에 취한 듯이 풀린 눈으로 손은 잔뜩 긴장해서 벽을 붙들고 있었다. 마옵에에서도 마지한테 볼을 붙들려서(?) 잔뜩 귀여움 당했었지. 심지어 꽤나 예전 필모인 샨나라 시즌2에서도 여캐한테 키스당하거나 턱을 붙들리거나 한다. 제임스딘과 같은 올드 할리우드 감성을 뿜어내는 남자 배우 치고 상당히 섬세하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섹슈얼한 씬을 풀어내는 게 오스틴의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마고와의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오스틴은 유혹당하고 휘둘리는 입장이더라. 그게 참…좋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목소리 쓸 때 불안감 증폭되는 놈이면서 그냥 성적으로 유혹하니까 목소리 안 써도 무릎도 알아서 척척 꿇어줘, 상자에 손도 넣어줘, 혈통도 내어줘… 마고가 요리해먹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네 싶다. 목소리 안 썼는데 무릎 꿇은게 진짜 미친놈이다.
물론 로타도 베네 게세리트를 아내로 삼으면 자신의 지위 확보에 유리하게 작용할 거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잠자리를 가졌을 가능성도 무시는 못 하겠지만, 마고를 보는 로타의 눈에 초점은 죄다 풀려있고 입도 예쁘게 벌린 채로 완전히 무방비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건 딱히 경우가 아닌 듯하다.
6. 폴과의 관계
로타가 폴의 거울상같은 존재라는 점은 캐스팅 일화를 포함해 수많은 인터뷰에서 밝혀져왔지만, 이 부분이 사실 영화 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영화의 상당 부분이 폴의 프레멘 적응기에 러닝타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폴과 로타의 관계성은 베네 게세리트들의 설명을 제외하면 오로지 시각적인 장면을 조합하여 관객이 유추해내야 한다. 명예를 중시하고 사랑할 줄 알며 사랑 받아본 경험도 풍부한, 운명을 피하고만 싶은 폴. 명예보단 승패를 중시하고 사랑을 받아본 경험도, 준 경험도 없으며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로타. 설정만으로도 이렇게 재밌을 수가 없는데, 둘의 대비가 영화상에 잘 나오지 않고 드니 감독도 이 부분을 딱히 강조하고자 했던 건 아닌 것 같아 많이 아쉽다.
그치만 ‘사랑받고 사랑해준 폴’, ‘사랑을 받은 적도 준 적도 없는 로타’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떻게 로타한테 이렇게 기구한 운명을 지워 줄 수가? 나고서부터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 한복판에 던져져서 남작의 비정상적인 사랑을 받아내야만 했고 자신을 사랑해 줄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었다니 우리 로타의 행복은 누가 책임져 줍니까? 권력이 밥 먹여줍니까? 아 밥은 먹여주지 내 말은 마음의 양식을 채워주냐고. 폴은 태어나지도 않은 여동생한테 사랑한다는 말이나 듣는데 우리 로타는 라반 제끼질 못해서 안달이나 나있고 집안 꼴 잘 돌아간다. 그렇다고 제시카같은 엄마를 붙여주고 싶은 건 아님. 우리 로타한테 누가 사랑 좀 알려주라.
근데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긴 하지만 칸리 마지막 장면은 진짜 드니가 미친 건가 싶었다. 나는 로타폴 파진 않지만 로타폴 파는 사람이 보면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장면 아닌가. 로타의 칼이 폴의 손 안을 점점 파고들고? 둘이 무슨 듀엣곡 춤 추는 것마냥 서로 앉아버리고? 그것도 폴 여친 눈앞에서(솔직히 조금 웃겼다)? 둘 얼굴이 너무 가깝고? 여러모로 미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각설하고, 로타는 왜 마지막 폴의 칼을 알아차리지 못 했나. 로타 정도의 실력자가 적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단순히 방심하여 공격을 눈치채지 못 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로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름의 내면적 이유가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말은 했지만 이 이후로는 순전히 꿈보다 해몽, 그것도 내 상상으로 부풀린 해몽이다. 폴과의 전투 직전, 로타는 ‘나는 이미 혈육을 죽인 적이 있다’고 말한다. 태연한 듯 말했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컴플렉스가 있는(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로타는 다시 한 번 마주한 혈육의 죽음, 그것도 자신과 매우 닮아있는 사촌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로타는 그 사실을 개의치 않는 듯 보이며 오로지 전사로서의 모습만을 보여주지만, 폴의 목에 칼을 꽂아넣기 직전에 그 사실이 로타의 내면에 약간이나마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이, 폴이 남작의 숨통을 끊어버리지 않았나. 그토록 증오하고 애정했던 대상을 죽인 자가 자신의 칼에 패배하는 상황을 목전에 두고 로타가 침착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남작을 이긴 폴에게서 승리를 가져옴으로써 궁극적인 승리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 그 흥분감이 로타를 잠시나마 뒤흔들고 틈을 만든 거 아닐까. 어쩌면 ‘폴이 남작을 로타의 눈앞에서 죽이는 것’이 수많은 미래 중 자신이 로타를 이기는 루트의 필요 조건이었을 지도. 결국 폴이 로타를 이김으로써 로타는 자신이 남작을 이길 가능성은 알지 못 한 채 눈을 감고 말았네.
아 많이도 썼다. 암튼 나는 로타 기대했던 것보다는 분량 많고 임팩트 오지고 씬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사연 구구절절이 아닌 악역이라는 점이 너무나도 좋았고 무엇보다 오스틴이 이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역할을 상상력 맘껏 발휘하며 신나게 연기했을 생각을 하면 정말 기특해 죽을 것 같아서 로타 너무나 사랑하게 됐다. 다만 이제 2차까지 찍어보니까 내가 후반부 로타 보자고 앞의 약 1시간 반을 견딜 자신은 없어서 n차는 조금 고민해봐야겠다. 분명 1차 찍었을 땐 ‘몇 번이고 봐 주지’ 상태였는데 막상 2차 찍으니까 의욕이 떨어져버렸음.
그치만 우리 오스틴이 찢은 페이드 로타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리며 오스카 노미까지 함께 기원해 주시길.